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테란트 공화국/주민과 문화 (문단 편집) === 프리덴란트(Friendenland) === 프리덴란트는 옛 미테란트 연합왕국의 구성 영방국가들 중 이름이 언급된 단 두 개 영방국가[* 나머지 하나는 이오니아의 가문명인 에스칼로프 공작령이다. 차후 작중에서 작위를 가진 귀족의 가문명이 작중에 언급된다면, 그 이름의 영방국가가 미테란트 연합왕국에 속해 있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된다.] 중 하나이다. 프리덴란트는 북서부주와 서부주의 경계선에 걸쳐 있으며, 미테란트 연합왕국 내에서는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영방국가이다. 국호는 미테란트 연합왕국 시기 자신들이 미테란트 연합왕국의 자유를 수호하는 방패막이라고 자부하여 자국을 ‘자유의 땅’이라고 일컬으면서 확정된 것이다. 또한 프리덴란트 지역 출신자나 그 후예는 미테란트 국민임과 동시에 프리덴란트 사람을 자처하곤 한다. 이는 프리덴란트가 미테란트 연합왕국에서도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영방국가였음과 동시에, 미테란트 연합왕국의 각 구성국들과는 비교적 이질적인 민족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프리덴란트는 원래 에쉬르 제국이 성립하기 전 동방에서 유래한 기마민족들이 건국한 국가이다. 말하자면 우리 세계의 헝가리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미테란트 연합왕국의 구성국들 중에서는 가장 먼저 국가체제를 갖춘 케이스. 따라서 미테란트 연합왕국 건국 초기에는 상당 기간 맹주국으로서의 지위를 지켰다. 특히 프리덴란트는 대륙 서부의 대표적인 유사인류인 오크 거주지와 겹치고, 아울러 기마민족이라는 특징이 함께 작용해서, 용병인 오크 보병과 시민 중장기병, 그리고 귀족 기사단의 조합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현대 미테란트 육군 기갑부대가 자신들의 직계 조상으로 일컫는 것이 바로 프리덴란트 기병대이고, 미테란트 공군 강하엽병은 프리덴란트 경보병을 직계 조상이라고 일컫는다.] 특히 비슷한 시기 건국된 에쉬르 제국에 의한 서쪽으로부터의 침공을 막아내는 든든한 방패로서의 구실을 오랫동안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테란트 연합왕국이 건국 이후 안정기를 맞이하고 우리 세계의 르네상스 시대와 같은 수준의 문화 및 산업이 싹트자 순수 군사국가에 가까웠던 프리덴란트는 자연스레 경제적으로 낙후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미테란트 연합왕국의 최대 중흥기였던 대륙력 16세기 무렵에는 사실상 미테란트 연합왕국과 에쉬르 제국 중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가늠할 정도로 사실상 미테란트 연합왕국 내에서도 이단적인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에는 프리덴란트가 미테란트 연합왕국 중에서도 유일하게 공화국 체제였다는 것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그리고 그 결과, 에쉬르 제국의 미테란트 연합왕국 침공에서 프리덴란트는 미테란트 연합왕국을 배신하고 에쉬르 제국 편에 섰다. 이때 에쉬르 제국군의 선두에 섰던 프리덴란트 시민군 및 귀족 기사단과 정면으로 격돌했던 것이 바로 에스칼로프 공작령 기사단이었고, 작중에서 나오는 이오니아와 미하엘 기피에는 이때의 원한도 아주 약간이지만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미테란트 분할점령 과정에서 프리덴란트는 민족적, 그리고 정치적 이유로 에쉬르 제국에게 배신당했고[* 프리덴란트인은 인종적으로는 에쉬르 제국 황실과 같은 동방에서 전래된 유목민족이나, 서로 오랫동안 적대적 경쟁관계에 있었다. 경쟁에서의 패배로 프리덴란트인이 미테란트에 정착했던 것이다. 또한 프리덴란트인들은 에쉬르 제국이 내세웠던 절대왕정제도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프리덴란트인들이 그럼에도 에쉬르 제국 편에 섰던 것은 주로 경제적 이유에서였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프리덴란트에 맞서 싸웠던 에스칼로프 공작령보다도 나쁜 대우를 받았다. 이 때문에 프리덴란트는 한 차례 에쉬르 제국에 반기를 들었고, 이것이 최초의 미테란트 독립 시도 사례였으나 예전 배신의 앙금 때문에 미테란트 전역에 걸친 호응이 없어 참패하고 말았다. 심지어 프리덴란트 반란 토벌에 재건된 에스칼로프 공작령 기사단이 가장 열성적으로 참여했을 정도다. 이후 프리덴란트는 이중의 배신이라는 멍에를 짊어지게 되어 오랜 기간 동안 미테란트 독립주도세력에게도 에쉬르 제국에게도 백안시되었다. 프리덴란트가 미테란트 독립주도세력과 본격적으로 화해한 것은 광역성비조절마법에 의해 미테란트 전역이 막대한 피해를 입은 뒤의 일이었고,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프리덴란트 출신은 알게 모르게 따돌림을 받았다. 특히 미테란트 서부에서의 따돌림은 강도가 상당히 심해서, 중부 유럽에서 유대인이 받았던 것과 비슷할 정도였다. 그 때문에 프리덴란트는 집단 차원에선 적극적으로 미테란트와의 화해를 도모했으며, 그러면서도 개인 차원에선 따돌림에 대한 반발로 옛 풍습을 지키는 데 집착하는 경향도 함께 보이게 되었다. 그나마 독립전쟁 발발 직전을 전후해서는 민족주의를 거의 벗어던질 수 있게 되었고[* 이와 같은 따돌림의 해소에는 프리덴란트인 스스로의 노력과 더불어 미테란트 내부의 분위기 전환도 함께 작용했다. 대륙력 20세기 초반 민족 단위의 차별에 대해 자성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대륙력 21세기에 접어들어서는 오히려 차별 속에서도 고유문화를 지켜온 프리덴란트 사람들을 경외시하는 경향까지 생겼던 탓이다. 또한 미테란트가 다민족국가임에도 민족 대립이 사실상 없어진 데는 이 프리덴란트 차별에 대한 자성이 크게 작용했다.], 독립전쟁 전후세대에 이르러서는 프리덴란트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에 집착하는 경우를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